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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17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 강제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 강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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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시인'에서 여행자로 길을 나선 강제윤 시인의 티베트 로드에세이다.


서점의 여행서적 코너를 한참 뒤적이다가 결국, 종교서적 코너에 가서야 이 책을 발견하고 갸우뚱했었지만, 서가에 제대로 꽂혀있었음을 몇 쪽 뒤적인 후에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로드에세이를 표방한 것이다.

시인은 여러가지 증거들을 지참하여 짧지만, 강렬하게 종교와 종교가 만들어놓은 허구와 우상을 맹렬히 공격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시인이 '신의나라' 티베트에서 무참히 짓밟힌 신과 종교의 존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않는 나라'다.

다른 여행서와 달리 이 책은 그 곳에 가고싶은 마음을 싹 사라지게 한다. 유성용의 '여행생활자'에서 보았던 차마고도와 '신의도시' 라싸에 대한 환상은 무참히 뭉개지고, 인간욕망이 남긴 씁쓸한 뒷맛이 영 게운치 않다.


시인은 인간의 욕망에서 우리가 진리라 믿는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탐욕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며, 그 허망한 탐욕을 기저로 하는 종교적 허구와 우상숭배의 믿음에 대한 공격의 시위를 당긴다.    

인류가 저지른 잔악한 행위는 대체로 물질에 대한 욕망에 기인한다. 하지만 물질에 대한 욕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정신의 욕망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약탈과 살육을 불러왔다면 정신의 욕망은 사람의 씨를 말렸다. 인류의 수많은 전쟁을 보라. 물질에 대한 욕망보다 정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 더 사악하지 않았는가. 성전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종교전쟁과 살육들, 홀로코스트는 또 어떤가. 유대인의 절멸과 아리안족 순혈주의를 주장하며 4백만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가 이루고자 한 것이 물질에 대한 욕망이었는가. 2백만 인민을 학살한 크레르루즈나 좌우대립으로 수백만이 학살된 해방 전후의 한국 또한 물질에 대한 욕망보다는 이념이라는 정신의 욕망이 더 크게 작용하지는 않았는가.


종교는 현세와 내세로 향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먹고자란다. 인간욕망은 종교 숭배의 기세를 더욱 맹렬히 타오르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가장 때묻지않은 순수한 종교라 믿었던 라마불교조차도 그 안에는 인간욕망의 찌꺼기들이 순수한 순례자들의 믿음을 오염시키고 있다. 라마사원 한 켠에서 시인의 눈에잡힌 라마불교의 그림자가 이채롭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순례자들은 버터기름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 법당을 옮겨가며 버터램프에 기름을 붓는다. 불상마다 지폐를 바친다. 야크 젖을 짜고, 버터를 만들고, 양들을 길러 어렵게 모은 지폐다발을 참배하는 불상마다 풀어놓는 노인들. 법당 한편에는 순례자들에게 잔돈을 바꿔 주는 라마승의 손놀림이 바쁘다. 어떤 순례자는 불상 앞 제단의 지폐더미 속에서 스스로 환전을 해 가기도 한다. 순례자들이 법당을 돌며 복을 비는 동안, 라마승들은 2층 방에 앉아 뒤섞인 지폐들을 분류한다. 돈다발을 묶느라 경황이 없는 라마승들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기름지다. 깡마르고 거친 얼굴의 순례자들은 기도에 심취해 있다. 저 돈들이 예전에는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전을 짓거나, 불상을 조성하거나, 사원을 건설하거나, 종교의식을 집전하거나, 살찐 라마승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사용됐었다. 지금 저 많은 돈든을 다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 것일까?


금세기 모든 인간의 영적인 스승이자, 티베트인들의 절대적 군주인 달라이 라마.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가장 낮은 곳에서 평화와 인류애를 구원하는 환생한 생불의 모습이 아닌 우상화된 권력이라는 시인의 주장에 홀연 아연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개인숭배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만은 그토록 관대한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다시 그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인격신의 숭배자들을 논리나 이성으로 이해할 길은 없다. 하지만 무엇을 탓하랴. 기대고 싶으면 바위나 나무 한 그루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사람 아닌가. 하지만 달라이 라마 숭배에 관용적인 사람들은 어떠한 개인숭배도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숭배의 이유가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본질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가 궁에 들어가 왕이 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궁 밖의 낮은 곳으로 내려올 수 있는 것은 그의 의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높은 곳에 있다. 다람살라에도 있고, 포탈라궁에도 있고, 노블링카에도 있다.


wufgaeng against censorship님이 촬영한 Norbulingka Summer Palace.


천개의 방을 가진 포탈라궁전도 왕에게는 오히려 부족한 곳이었을까? 현 14대 달라이 라마가 지은 여름궁전, 노블링카는 36만 평방미터의 땅 위에 세워진 별궁이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 민중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인민의 돈으로 여름 궁전, 겨울 궁전을 짓고 호화판 생활을 한 위선자였다'고 교육시킨다고 한다. 나는 달라이 라마가 위선자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가 1954년 ~ 1956년, 중국의 점령 하에서 새로 지은 여름 궁전, 노블링카가 왕관을 쓴 스무 살 청년의 여름 한철 별장으로만 쓰이기에는 지나치게 호화스럽다는 점만은 분명해보인다.



시인은 신앙과 믿음이 곧 생활이요, 불교가 곧 모든 세계관을 대신하는 티베트에서 권력화되고, 우상화된 종교의 허구를 매섭게 공격한다.

사람이 손으로 만든 불상이나 법당보다 태양과 구름, 하늘과 산이야말로 천상의 사원이고 법당이다. 사원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현세와 무관하다. 언제까지 오지 않을 내세에 온 생애를 걸고 있을 것인가? 어째서 현세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 것들, 고기와 버터와 우유와 치즈를 주는 야크와 염소, 양, 이들을 먹이고 키워 주는 산과 들, 보리를 키워 주는 태양과 구름과 비와 흙, 생명의 물을 주는 호수와 산소를 주는 대기를 경배하지 않고 사람들 자신의 손으로 빚은 나무나 쇳덩이들만 경배하는 것인가? 티베트만이 아니다. 지상의 모든 종교가 그렇다. 돌이켜보면 태양과 바다와 바람과 물, 나무를 숭배하던 고대야말로 참된 종교의 시대였다. 제도화된 종교는 '저 세상의 문제를 다루는 관청(E.블로흐)'이며 인간을 억악하는 권력일 뿐 진정한 종교는 아니다. 티베트에서도 나는 신성한 정령들을 만날 수 없다.


종교에 대한 논쟁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종교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인류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만들어진 신')에 '도킨스의 망상'이라며 종교원론적인 반발이 거세게 맞부딪히는 것을 보면 종교는 누가 정답을 내릴 수 있는 영역의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아마도 이는 인류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풀리지 않는 논쟁의 테마가 될 것이다. 어쨋거나 시인은 도킨스와 불가지론적인 생각의 궤를 맞추는 듯 하다.

전생이니 하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신앙이다. 나는 전생이 있다고 신앙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생은 오로지 한 번 뿐이다. 수도 없이 반복되는 생이라면 생이 소중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전생과 후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과법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허황된 소리지만 설령 전생이 있다고 한들 자신이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고 남이 알려 준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면 그것이 무슨 전생이겠는가. 후생이 있다고 한들 스스로 갈 곳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후생이겠는가. 생(生) 이전에 전생은 없다. 사(死) 이후의 후생도 따로 없다. 삶 밖에 극락이나 지옥이 없고, 삶 속에 지옥도 있고 극락도 있듯이 전생이나 후생이 있다면 그 또한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같지 않다. 내일의 나 또한 오늘의 나와는 다를 것이다. 어느 한순간도 같은 나는 없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는 오늘 나의 전생이다. 내일의 나는 오늘 나의 후생이다. 어제 내가 악한 마음으로 악한 짓을 했으면 오늘 나는 악인이다. 오늘 내가 선업을 쌓았으면 내일의 나는 분명 선인이다. 인간은, 존재는 매일, 매순간 그렇게 윤회한다. 그것이 인과법이다. 그것이 전생이 있고 후생이 있다는 것의 의미다. 환생의 참 모습이다.


결국, 신의나라로 신을 찾아 떠난 시인은 부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신 시인은 부처님을 비롯한 위대한 성인들의 세계에 좀 더 진솔하게 다가가자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욕망을 먹고자라는 탐욕스럽고 우상화된 종교가 아니라, 참된 자아속에서 진리와 믿음을 구원하는 수행자로서의 길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불교왕국 티베트에서 나는 기쁨의 부처를 만나지 못했다. 오로지 슬픔의 부처님을 친견했다. 부처님은 생사윤회의 사슬을 끊고 적멸에 드셨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지에 오르셨다. 불생불멸, 다시 태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경지,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에는 여전히 고해에 빠져 허우적대는 중생들이 무량수인데 부처님은 결코 중생들을 건지러 오실 수 없다. 삶과 죽음을 자유자재로 하는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란 가련한 중생들이 만들어 낸 소망의 경지일 뿐, 오시고 싶어도 다시 오실 수 없는 불생의 경지에 계시는 자비의 화신이신 부처님의 비탄이 얼마나 클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불심 가득한 이 나라에서 슬픔의 부처님, 비탄의 부처님을 친견했다. 부처님께서는 결코 당신이 다시 중생들 곁으로 오지 못할 것을 예견하시고 부처님 당신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부처님이 슬프다.

어떠한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기다 죽은 밭갈 소나 놀다죽은 한량'이나 죽음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죽음을 담보로 한 사업은 밑지거나 망하는 법이 없다. 죽음을 담보로 한 최고의 사업은 종교다. 사후세계의 땅 한 평은 아무리 비싸도 팔리지 않는 경우란 없다. 전 재산을 다 주고라도 사게 마련이다. 티베트는 마치 죽음의 도매시장과 같다. 티베트뿐이겠는가. 종교란 어디서나 죽음의 도매상인 동시에 구원을 파는 쇼핑몰이다.


시인이 마지막으로 던지는 비유가 흥미롭다.  이 책의 끝 단락이다.

원시 어로 방법에 '독살'이란 것이 있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원리를 이용한 어로 방법이다. 돌담을 뺑 둘러쌓아 들물 때 물고기를 가둔 뒤 물이 빠지면 갇힌 고기를 건져 내는 함정 어로다. 티베트에서 나그네는 신이 만든 독살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인다. 시간으로 짠 그물. 함정인지 도무지 눈치도 챌 수 없는 함정을 파 놓고 그저 기다리는 시간이 판관이다. 시간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은 갇힌 줄도 모르고 먹이를 찾아 헤엄치며 놀 것이다. 더러 산란도 할 것이다. 티베트만이 아니다. 독살에 걸린 가련한 물고기들처럼 사람들의 생애가 온통 그렇게 흘러간다.


( ※ 글 중 사진은 Flikr에서 빌려온 '노블링카(여름궁전)' 전경이며, 음악은 Karjam Saeji가 부르는 'The Tibetan Alphabet Song(여행자의 노래 5)'을 빌렸습니다. )


2009, 1, 20., Posted by Sweetp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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