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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03 이청준의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1)

이청준의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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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국문학의 거봉 이청준선생이 영면에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우리의 역사와 한(恨)을 인본주의적 필체로, 동양적 선과 여백의 미학으로 풀어낸 한국문학의 큰 산이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대학시절, 실천주의 계열의 문학이 판칠 무렵, 선생의 여러 순수문학 작품들을 접하고나서 그의 작품이 장구한 민중사를 비현실적 허구로 덮어놓은 설화문학이라고 폄훼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밤을 새워가며 그의 작품들에 잇따라 빠져들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서 선생이 풀어놓는 설화 또는 민화풍의 얘기보따리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발견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작품은 현대사를 줄기차게 이어온 민초들의 삶에 기반한다. 일제점령과 4.3항쟁, 경인년 전란, 그리고 그 이후 독재와 급속한 가치관의 격변 속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외면하지도, 또 한껏 몰입해 들지도 않으면서 그런 역정속의 인간사를 비극적 실존주의 문제로 풀어왔다.

파란만장한 이데올로기적 현대사를 자욱한 안개처럼 농밀하게 가리운 채,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숙명으로 받아드릴 수 밖에 없었던 나, 가족, 우리 부모님의 얘기로 풀어헤쳐놓은 것이다.

선생은 그의 작품속에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회변혁적 논제도 담지않은 채 그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삶의 조각들을 웅숭깊은 시선으로 담담히 바라보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죽창과 화기를 들고 싸우던 충혈된 삶이 아닌, 두엄더미에 숨어서 두려움에 떨던 순박하고 처연한 인생의 모습이다.

선생의 작품에 묻어나는 문체는 마치 동양미학과 문학을 적당히 버무려놓은 듯 유려하다. 거기엔 우리의 남도 가락이 있고, 넉넉한 여백의 그림이 있고, 애절한 한(恨)과 휴머니즘이 깃든 설화적 정서가 들어있다. 가장 실존적이기에 가장 한국적일 수 밖에 없는, 지극히 구체적인 소재를 완곡하고, 의뭉스럽게 버무려놓은 허구의 미(美)가 맛깔스럽게 담겨있다.

그래서 선생의 글은 차마 한국적이다. 선생은 이념을 넘어선 실존의 문제를 관념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그 안에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가 담겨있고, 우리의 한(恨)의 정서가 녹아있는 것이다.


선생의 부음을 접하고, 그의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읽었다.

지난해 폐암말기를 선고받은 이후에 병마와 사투를 벌이며 출간한 선생의 마지막 작품집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글에는 인간본성(人本)에 다가가려는 선생의 따뜻한 시선이 그만의 유장한 문체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으레 노작가의 글에는 고즈넉한 잔광이 가득찬 황혼녁의 색깔이 묻어남을 발견한다. 조금 먼저 소천한 박경리가 그러했고, 고희를 넘긴 박완서의 근작들이 그러한 것처럼, 선생의 마지막 소설집에도 인생을 바라보는 노작가의 우물처럼 깊은 삶과 생명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다.

특히, 우리 선대(先帶)의 처연하고, 한스러운 인생이 그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음을 누렇게 빛바랜 사진을 꺼내 보여주듯 소박하게 항변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의 현대사를 불꽃튀는 모순과 갈등의 세계관으로 바라보기 보다, 먹구름처럼 다가오는 숙명속에서도 꿋꿋하게 또는 비굴하게라도 삶을 영속해온 우리네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작품속 인물이 누구라 하더라도 피곤하고, 노쇠한 인생들의 속깊은 변명들을 이해와 용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후세들이 숭고히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 현대사의 보다 진실한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선생의 석새삼베같은 글들을 다시 만날 수 없게됐음에 안타까움 금할 길 없다.

불귀의 길을 떠나신 선생의 명복을 빈다.


                                                                              2008. 8. 3., Posted by Sweetpee.



 

Trackback 0 And Comment 1
  1. 낭만시인 2008.08.04 10:2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도 이청준 선생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요즘은 새로운 시각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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