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책장'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09.04.02 나는 지금 De Botton을 읽는다 (1)
  2. 2009.03.08 문예지 '자음과 모음' (2)
  3. 2009.02.22 다자이 오사무의 '나의 소소한 일상'
  4. 2009.02.04 조경란의 진실 - '맛보고 말하고 사랑하는 혀' (1)
  5. 2009.02.03 법정의 '아름다운 마무리'

나는 지금 De Botton을 읽는다

|



요즘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에 빠져지낸다.

그가 기록한 방대한 인문학적, 철학적, 예술적 관찰에 감탄하며,
그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에 사랑어린 동질감을 나누며,
그의 작품과 그의 사유(思惟)의 세계에 흠뻑 몰입해 지낸다.


드 보통은 괴물이다.

머리가 훌러덩 벗겨진 그다지 매력없고 투박한 외모지만,
그의 날카로운 지성과 미세한 감수성의 떨림에 그의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다.

프루스트식의 삶에 대한 따뜻한 관찰과 존 러스킨의 편집증적 디테일을 적절히 버무린...
그의 글들에서 21세기식 글그림의 선지적 전형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지금 드 보통을 읽고있다.



1. 여행의 기술 (2002, The Art of Travel)





2.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3.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2000,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4.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1993, Essays in Love)





5. 불안 (2004, Status Anxiety)





6. 동물원에 가기 (2005, On Seeing and Noticing)

 
 
 
2009. 4. 1., Photos from www.alaindebotton.com, Posted by Sweetpee)
 
 

 
Trackback 0 And Comment 1
  1. 낭만시인 2009.04.06 10:35 address edit & del reply

    여행의기술을 읽다 미쳐버리는줄 알았습니다. 어찌나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튀어대는지...

문예지 '자음과 모음'

|





'자음과모음(이룸출판사 刊)'.  요즘 새로 구독하는 문예지다.

작년 가을에 창간호가 나와 지금까지 3호가 발행됐다.
다른 문학지들과는 달리 장편소설을 주로 연재하는 점이 특징이다.
지난호를 보지 못했다면 신간이 별로 의미가 없는 꼴이다. 
여러 단편이 모여 하나의 장편을 이루는 픽스업(Fix-up)도 이 잡지의 재미있는 구성이다. 

소설 뿐 아니라, 국내외 이야기꾼들의 정치경제, 철학, 미학, 문예비평 등의 다양한 담론들도 흥미롭다.

계간임을 감안하더라도 일단 두께가 압권이다.
2호(2008년 겨울호)는 무려 700쪽이 넘는다. 보고 또 봐도 언제나 읽을거리가 넉넉하다.

바야흐로 인터넷과 매스미디어가 범람하는 때에 새로운 문예지가 창간됐다는 것 자체가 반갑기 그지없다.
창작과비평, 문학사상, 실천문학,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문예중앙, 현대문학, 월간문학 등 몇몇 잡지들을
제외하고는 참으로 명맥을 이어가기 어려운 것이 문예지다.






94년에 창간한 '리뷰(REVIEW)'라는 잡지를 폐간때까지 구독한 적이 있다. 

창간 당시 서태지를 특집으로 다루는 등, 문학과 비평, 대중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쟝르를 넘나들며
나름대로 독자층을 모았는데, IMF의 험난한 파고를 넘지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다른 잡지류와 달리 열심히 탐독한 문예지는 쉽게 버리기 어려워 아직도 책장 한 켠에 놔두고 있다.
정녕코 다시 들여다 볼 일이 없음에도 말이다.





더 오래된 것들도 있다. 현대문학(現代文學) 창간호부터 약 50호까지다. 

단기 4291년(1958년) 1월에 창간호가 발행됐으니, 얼추 반세기가 넘었다.
책 내지는 누렇다 못해 갈색으로 바뀌었고, 조심스레 펼치지않으면 종이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진다. 

당연히 발행 당시부터 사서 모은 것은 아니고, 대학교때 우연히 서울역앞 중고책방에서
권당 50원씩인가 주고 산 것들인데, 용케 아직도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김동리, 황순원, 서정주, 정종화, 유치환, 양주동, 유진오, 한무숙, 이범선, 염상섭 등 학교다닐때
국어 수업시간에나 들어봄 직한 이름들의 선대 작가들과 작품들이 아련한 세월을 느끼게 한다.





문화는 사회적 삶의 투영이라고 했던가. 

글문화를 담은 문예지는 당시 사회적 모습들을 활자로 남겨놓은 그림자다. 
그래서 다른 잡지와 달리 쉽게 폐기하기 어려운가 보다. 

이제 막 창간된 새 잡지도 만세 번영하기를 바란다.

  
2009. 3. 1., Posted by Sweetpee



Trackback 0 And Comment 2
  1. namakwa 2009.09.14 20:57 address edit & del reply

    계간지 검색을 하다 우연히 들어왔는데 쓰신 글이며 사진이 가슴에 박히네요. 처음으로
    인터넷 기능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책을 구입하다 보면 아무래도 단행본 위주로 구입을
    하게 됩니다. 계간지를 즐겨 읽고는 있지만 워낙 많은 계간지들이 씨즌별로 나오다보니
    정기구독하는 몇몇을 빼고는 대개 서점에서 훑어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런 저의 이기적인 행동들도 수많은 잡지들이 폐간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겠지요.
    '사회적 모습들을 활자로 남겨놓은 그림자'를 소장할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계간지를
    구입할 가치가 충분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좋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마리 2010.01.14 08:15 address edit & del reply

    계간지 무척 좋아 하는 저도 옛날 계간지를 몇권 가지고 있어서 시간이 나면 들추어 보곤 합니다.
    이런 책들을 소장 하고 계시다니 저의 첫 눈이 아니 예리하달수 없겠습니다. 헤헤..
    근간에는 전문 서적만을 보기에도 빠듯한 터라 이런 좋은책들을 외면 했구요.
    얼마전엔 좀 휴식이 필요해서 소위 베스트셀러 라는 책을 집어 들어 읽기 시작 하다가 진정 더 이상은 유치해서 읽어 줄 수 가 없더구만 하며 덮어 버리긴 했습니다.
    자음과 모음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나의 소소한 일상'

|





주말동안 다자이 오사무의 산문집 '나의 소소한 일상'과 씨름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고약한 편집증적 이기주의자의 자기몰입을 이해하느라 머리아픈 시간을 보냈다. 
일부의 아포리즘들은 그냥 흘려보내야 했다.


'지난 반세기 간의 일본문학은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존경하는 거장'
'20세기 일본의 젊음을 열광시킨 지독하게 순수한 에고이스트의 빛나는 아포리즘"

책의 표지와 띠지에 붙은 그의 소개를 무시하더라도, 전후 일본의 데카당스(무뢰파) 사조의 수뇌로써,
또한 그의 순수이성과 자기몰입을 추종하는 현대 일본 작가들에게 분명하게 각인된 그의 존재는 
가히 일본문학의 정수리라 하지않을 수 없다.


'나의 소소한 일상'은 역자가 붙인 제목이다.

이 책에는 그의 아포리즘적 성격의 대표적인 글들과 소설과 수필의 모호한 경계에 붙어있는 글들을 묶은
내용들로 채워져있다.

제목에는 '소소한'이라고 표현되었지만, 결코 미니멀한 우주관이나, 신변잡기적인 소소로움을 얘기하지 않는다.
다자이 그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와 자책. 주변적인 것으로부터 작가적 양심을 광적으로 보호하려는
극렬한 허무로 가득하다. 무겁고 때론 쓰라리다.

죽음과 자살에 대한 사유강제, 패전후 사회의 공포와 혼미에 대한 그의 두려움과 증오는 마치 분열증 환자들의
어휘인양 자신의 강렬한 체험과 숭고한 인상들을 표현하기에 언어가 결핍된 것처럼 보인다. 
이래저래 그의 언어는 낯설고, 다가가기 어렵다.

그를 통해 우리의 이상(김해경)을 반추한다.
현실을 수용하기 힘들어했던, 다소 소아병적으로 순수이성에 매달리려 한 천재적 열정과 문학적 진정성.
이상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삶과 철학의 시녀. 고통스런 사유가 잉태한 핏덩이. 절대 허무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기차표.
하지만 이미 되돌아가기에 너무 멀고, 목적지를 향해가기도 너무 먼 광활한 평원.
결국 쓰러져 모래바람에 덮혀진 작가의 고뇌들... 

리베르땅, 다자이 오사무를 찬양한다.
 
2009.02.23., Posted by Sweetpee



* 다자이 오사무 작가소개

1909년 아오모리현 쓰가루군의 갑부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

어려서부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 심취하였고, 도쿄 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여 이부세 마스지에게 사사하였다.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를 얻은 졸부라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며 대학시절 좌익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30년 연인 다나베 아쓰미와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혼자 살아남는다.
1935년 ‘일본낭만파’에 합류하였으며 「역행」으로 제1회 아쿠타가와상 차석을 차지한다.
하지만 심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심사 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항의하는 글을 발표한다.

같은 해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병발, 입원 중 처방된 마약성 진통제 파비날에 중독되어 정신착란적인 문체를 선보이기도 한다.
이듬해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이후 몇 년간 작풍을 전환하여 밝고 긍정적인 가작을 많이 남긴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 문학’이라 불리며 패배감에 쌓여 있던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1948년 6월 13일 연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도쿄 미카가의 다마강 상수원지에 투신한다.
다섯 번째 자살 기도였고, 다자이 오사무는 서른아홉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조경란의 진실 - '맛보고 말하고 사랑하는 혀'

|



작가 조경란에 대한 첫기억은 오래전 신문에서 읽은 그녀의 옥탑방에 대한 기사다. 

침대와 책상이 공간의 전부를 차지하는 그녀의 봉천동 옥탑방에는 오갈 곳없는 책들이 방바닥 가득 쌓여있고, 
돌아눕기 조차 어려워보이는 좁아터진 공간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성찰하는, 창조의 신비한 공간'이라고 했지만, 나는 가난한 문학가의 쓸쓸한 공간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도 '봉천동 옥탑방'은 그녀의 이름앞에 수식어처럼 따라붙었다. 



최근 그녀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준 소설집 '풍선을 샀어'를 읽었다.
혼자 무언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듯한 외롭고, 우울한 작가의 서정은 이 책에도 여전하다.


시내 서점에 나가보면 이 책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꽂혀있다. 웬지 그녀의 최근 모습들은 예전보다 좀 더 세련돼 보인다. 
섭생의 걱정은 조금 덜었겠구나.

오늘은 이 책이 아닌 다른 얘길 할란다.



지난해 그녀가 직접 소설속 주인공으로 들어간 듯한 일이 있었다. 표절시비다. 

신춘문예에 내놓은 어느 작가지망생의 작품.
그리고 이 작품과 비슷한 모티브와 주제의식을 다룬 중견작가의 또다른 작품. 
서점에 가면 동일한 제목의 책이 나란히 놓여있다.

작가지망생은 주이란이고, 중견작가는 조경란.
두 작품의 제목은 똑같이 '혀'. '맛보고 말하고 사랑하는 혀'에 대한 공통된 모티브.
다르다면 하나는 단편이고, 다른 하나는 장편이라는 점.
신예작가의 '혀'는 예심에서 탈락했으며, 중견작가는 이 신춘문예의 예심 심사위원 중 한 명.  


몇 달 후, 똑같은 제목의 '혀'가 중견작가의 이름으로 출간.
이를 본 작가지망생이 문단을 찾아다니며 표절논란에 불을 붙였지만 불발. 
급기야 화가난 작가지망생의 남편이 직접 출판사를 세우고, 똑같은 제목의 단편소설집 '혀'를 출간.
이를 둘러싼 쌍방간의 진실게임. 독설과 회유에 이어 문단 전체로, 주류와 비주류 언론으로의 확전.
그리고 해를 넘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이 소설같은 이야기의 줄거리다.  

표절시비를 넘어 진실게임으로 가고있는 이 논란에 대해 어느 한 편에 서서 거들 말은 없다. 
시끄러운 싸움판에 모기소리라도 한마디 덧붙여봐야 잡음만 더할 뿐이다. 


창작의 빈곤으로 메말라가는 국내 문단의 현실만 확인하고 간다. 
소재의 빈곤, 상상력의 빈곤, 좁아터진 소재를 향한 창작의 한계. 시장의 쇠락과 외면,
그리고 이어지는 무기력한 작가들의 탈출. 


두 권의 '혀'. 재밌다. 심산하다.


2009. 2. 4., Posted by Sweetpee  


덧붙이는 글.

세가지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첫번째는 작가지망생이 중견작가에게 보낸 편지.
두번째는 중견작가가 자가지망생에게 보낸 편지.
세번째는 소설가 김영현(실천문학 대표)의 독설. '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주마'.
(각각 프레시안에서 발췌했습니다.)  


1. 첫번째 이야기

  조경란 작가님께

  본인은 2005년 단편소설 <혀>를 창작했습니다.

  당시 본인은 공책에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글을 썼습니다. 그만큼 <혀>는 본인의 땀과 열정이 녹아든 작품입니다.

  본인은 2006년 12월 11일, <동아일보> 2007 신춘문예에 <혀>를 응모했습니다. 2006년 12월 그 당시 귀하는 <동아일보> 2007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예심 심사위원이었습니다.

  2007년 11월 12일 귀하는 자신이 심사한 응모작인 본인의 <혀>와 사건의 구성, 전개 과정, 등장 인물의 성격, 배경, 주제, 소재, 결말, 뉘앙스, 문체, 상징, 문장이 유사하며 제목까지 동일한 소설<혀>를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초판 발행했습니다.

  본인의 <혀>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기관이면서 가장 이지적인 감각기관이기도 한 '혀'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이었습니다. 맛보고, 말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욕망을 '혀'를 통해 그려낸 것입니다.

  본인의 <혀>는 인간의 본능처럼 강렬하고, 함축적이며, 뚜렷한 주제의식을 담은 작품입니다. 여느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본인은 이 작품을 중편, 장편으로 다듬어 나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심사위원인 귀하가 그런 작품의 영혼을 가져간 것입니다. 신춘문예에 응모한 작품은 심사위원이 가져가라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본인은 심사숙고 끝에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보냅니다. 귀하에게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귀하의 <혀>는 떳떳하지 못한 작품이고, 응모자가 보낸 응모작품의 영혼을 훔쳐간 작품입니다. 귀하의 <혀>의 출판을 중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배포된 책을 회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8년 8월 27일 수요일

  주이란


2. 두번째 이야기

  주이란님께

  귀하께서 8월 27일 날짜로 보내주신 편지(내용증명)를 받고서 본인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표절이라니…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며칠 동안 심한 마음고생을 하였습니다. 귀하의 편지를 그냥 넘겨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답신을 보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이 편지를 보냅니다.

  귀하의 말씀대로 본인은 2004년 12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세 차례 <동아일보> 신춘문예 예심 심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해 신춘문예 응모작은 700여 편에 가깝습니다. 신춘문예 심사 방식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만 세 명의 예심 심사위원이 그 응모작을 모두 읽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책상 위에 놓인 응모작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대개는 한 심사위원이 200여 편이 조금 넘는 분량의 원고를 읽게 됩니다-그 중 본심에 올릴 만한 작품을 두서너 편 선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 명의 심사위원이 선정한 아홉 편 정도의 응모작을, 서로 돌려 읽지 않은 상태로 본심에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심사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2006년 12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 때 어느 심사위원이 귀하의 단편소설 <혀>를 읽었는가는,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본인이 읽은 기억도 없습니다.

  본인의 첫 번째 소설은 1996년에 발표한 <식빵 굽는 시간>이었습니다. 제빵사가 주인공인 그런 소설입니다. 그 소설이 출간된 후 현재 문학동네 출판사 강태형 대표와 다음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본인은 <식빵 굽는 시간>보다 먼저 쓰고 싶었으나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운 후 쓰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에 뒤로 미루게 된 요리 소설, <혀>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1997년도의 일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문학동네 출판사 강태형 대표가 증명해줄 수 있습니다.

  그 후 본인은 지금껏 발표했던 소설들을 쓰느라, 그때 구상한 요리 소설을 쓸 기회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렀고, 2007년 3월 13일 화요일에 문학동네 염현숙 국장에게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전에 본인이 <혀>라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 이상 그 소설을 미루지 말고 지금 집필해보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나서 본인 역시 이제 그 소설을 써야 할 적절한 시간이 되었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2007년 3월 28일 수요일, 일산에서 문학동네 대표와 염현숙 국장, 그리고 본인, 이렇게 세 사람이 만나서 그 요리소설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본인은 <혀>라는 제목이 지나치게 강렬한 데가 있어서 망설였지만 책을 오랫동안 만들어온 두 사람은, 그런 내용의 소설이라면 제목은 역시 <혀>가 가장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8월말, 집필이 끝났을 때 소설의 제목은 결국 <혀>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을 정한 일은 본인의 의지보다는 편집부의 의견이 컸습니다. 그렇게 하여 <혀>는 2007년 11월 6일, 출간되었습니다. 이것이 13년 전부터 본인이 구상해왔던 장편소설 <혀>가 출간되게 된 경위입니다.

  귀하가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는 단편소설 <혀>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맛보고, 말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욕망을 '혀'를 통해 그려낸 것'이라는 표현은 본인의 장편소설 <혀>의 광고 문안과 평론 중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잘 아시다시피 <혀>는 일반명사입니다. 귀하가 원하신다면 <혀>라는 제목으로 얼마든지 소설을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귀하의 단편소설 <혀>와 본인의 장편소설 <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귀하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본인에 대해 대뜸 표절 작가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정중히 사과할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더 이상 본인의 작가로서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삼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본인의 인내심으로도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출판사와 상의하여 법적인 조치도 강구할 것입니다.

  끝으로 이 편지는 사적인 것임을 밝힙니다. 귀하 외에 제3자나 언론매체에 공개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충분한 설명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만 혹 위의 내용에 관한 증명이 필요하시다면 앞으로는 본인에게가 아니라 <혀>가 출간된 문학동네에 확인해 보시고, 문학동네를 통해서 연락이나 그 밖의 절차를 밟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건필과 문운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2008년 9월 8일 월요일

  조경란
 

3. 세번째 이야기
  
'문학이여, 내가 먼저 침을 뱉어주마' - 김영현(실천문학 대표, 소설가)



적요함, 그리고 일지소란

적막하다. 바위처럼 외롭다. 아니 나무처럼, 안개처럼 외롭다. 문학의 신은 이미 오래 전에 사망 선고를 받고 죽었다. 아니, 죽지 않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슬픔과 그리움과 분노를 먹고 살았던 신, 우리가 외로울 때에 위안을 주었고,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게' 다독거려 주었던 신, 독재의 푸른 발톱 하에서도 살아 펄펄거리던 문학의 신은 어디로 갔는가.

대신 문학의 제단 앞에는 지금 파리의 이국적인 노천카페에 앉아 한 잔의 카푸치노에 흰 빵을 찍어 먹으며, 혹은 늦은 밤 베란다에 앉아 붉은 와인 한잔을 홀짝거리며 전혜린과 뭉크와 불륜을 꿈꾸는 자들이 앉아 있고, 그들이 신 없는 신전에서 잔치를 벌이는 동안 자신의 정신적 노고를 보답 받지 못한 채 쫓겨난 문학의 사제들은 초라한 거지처럼 저자거리를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사방을 둘러본다. 어디에도 살아있는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해마다 연중행사처럼 모 시인의 집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초조하게 노벨상을 기다렸다 흩어지고, 아직도 문단 황제의 꿈을 버리지 못한 작가들이 판을 휘젓고 다니지만 그럴수록 판은 더욱 초라해져 가고, 살아남은 것은 적요하게 무덤을 지키는 자들 뿐. 분노도 슬픔도, 비판적인 이성도 열정도, 자존심도 품격도 없는 문학 기술자들, 문학 전공자들이 벌이는 축제들 뿐. 대다수의 작가들이 일용직 노동자처럼 궁핍한 시대, 소설 한 편에 수천만 원, 시 한 편에 수천만 원이 호가되는, 로또복권보다 더 로또적인 문학상. 그렇게 자본주의적인, 너무나 자본주의적인 줄을 세우고 있는 자들과 줄서서 입을 벌리고 있는 초라한 군상들 뿐.

제발 문학은 죽어도 작가 정신만은 살아있기만을 바랐던 것은 꿈이었을까.

일제시대에도, 독재정권 하에서도 얼어붙은 가난 속에서도 한잔 술에 살아있던 작가혼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 어려운 시대, 이 가난한, 분노의 시대에…. 이 도처에 신음소리,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시대에….

적요하다. 너무나 적요하여 숨이 막힌다. 나 역시 어디 은둔이라도 할까보다.

그때 어디선가 자그마한 소란이 들려온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는가 보다, 할 뿐 관심이 없어진다. 요즘은 무관심이 미덕이다. 더구나 들려오는 소란의 내용인즉슨 '표절 시비'라는 낯익은 주제라니, 애초부터 누구 말대로 '매력 없는 공방'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소리란 당사들끼리 좀 티격태격하다가 제풀에 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처럼 점잖은, 이름께나 있는(?) 기성 작가들이 나서서 시시비비를 거들 판은 더욱 아닐 것이었다. 아서라! 술이나 마실란다.

그런데 소란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누군가가 분명히 분노를 하고 있다. 분노한 목소리는 들으면 금세 안다. 그 목소리 중에 평소에 알고 있는 자의 목소리도 끼어 있다. 드디어 독자까지 나선다. 그의 질타가 소설쟁이란 간판을 달고 사는 나의 귀에 까칠하게 박힌다. 하지만 철저히 적막하고, 철저히 무관심한 요즈음의 문학판에 그의 목소리 역시 바람처럼 곧 지나갈 것이다. 그러길 바라자.

그러나 마음이 한동안 무겁다. 내가 살아온 것. 나의 문학에 대한 오랜 번민에 빠진다. 갑자기 그토록 열정을 바쳐 살아왔던 세월이 모두 허망하게 느껴진다. 온 몸으로 부대끼며 지키려고 했던 가치가 갑자기 부질없어 보인다. 그와 함께 갑자기, 정말 갑자기, 문단의 일각에서 조그만 자리를 차지 한 채 그 역시 무슨 기득권이라고, 만수산 드렁칡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엉켜서 살아왔던 안일함, 스스로 키워온 무력감에 대한 배신감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그러고 보니 누구를 원망하기 전에 내가 가장 먼저 이 침묵의 무덤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문학의 신을 죽이고, 작가 정신을 유폐시킨 것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며 이런 '작은 일'에도 분개할 줄 모르는 가짜 소설쟁이, 가짜 지식인인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래, 문학이여, 미안하다! 순정한 독자 제위를 속이고 젠 체 목에 힘을 주고 살아온 자칭 문학도인 척 했던 내 얼굴에 먼저 침을 뱉어주마! 그러고 나서 문학에게, 천박한 유행과 시대에 굴종하여 이빨과 발톱을 다 뽑힌 채 멸시와 천대의 굴레에 떨어진 문학의 얼굴에, 힘껏 침을 뱉어주마! 문학의 신을 유폐시키고 마침내 죽여 버린 우리 시대의 문학 교수, 평론가, 작가, 출판사 기획자, 사장, 신문 기자들, 너와 나를 향해서도 마음껏 침을 뱉어주마! 자신은 아무 상관 없다고, 제발 자기를 이 '매력 없는 시비'에서 좀 빼달라는 우리 시대의 빌라도들에게 가래까지 게워서 침을 뱉어주마!

우리 시대의 빌라도들

내가 알고 있는, 사랑하는 후배 소설가 방현석은 '해명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당사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 이견이 해소되기를 기대했던 저의 바람과 맞지 않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저의 이름이 거명되어 불편한 오해가 확산되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제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당사자와 언론에 간곡히 당부합니다. 이 매력 없는 공방에 저를 더 이상 관련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지랄.

나는 헛웃음이 돌았다. 준엄하고 냉정하기까지 한 그의 '해명서'를 읽으며 나는 그가 내가 알고 있는, 과연 '새벽출정'을 쓴 그 소설가 방현석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때까지는 아직 두 편의 소설 조경란과 주이란의 '혀'를 읽기 전이었다.) 그의 글은 소설가 방현석이 쓴 글이라기보다는 거의 형사 앞에 끌려간 피의자가 쓴 심문조서에 가까웠다.

그는 그간 자신이 두 작품과 두 작가, 그리고 출판사 사이에서 했던 역할을 차례로 서술한 다음, 자신은 이 사태로부터 아무런 책임도 없고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 더 이상 자신의 영예로운 이름이 거론되지 않기를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방현석이 누군가. 누구보다 사태를 냉철하게 파악하는 힘과 논리를 지닌 작가가 아닌가. 그 어느 문장 하나 정서적인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조와 주, 두 사람에 대해서 동시에 거리 두기 역시 잊지 않는다. 불편부당(不偏不黨)! 어떤 동정심도 흥분도 눈곱만큼 찾아볼 수 없다.

사실 나는 문단 내에서 방현석과 같은 축으로 분류되는 무리이다. 그의 문제작 '새벽출정'이 <창작과비평>에 발표될 때 나의 졸작인 '벌레' 역시 같은 지면에 실렸다. 1980년대의 대표적 작가로서 그는 노동문학과 민족문학을 이끌어왔고 2000년대에는 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으로 황순원문학상과 오영수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전 <실천문학> 편집위원이었고, 현재는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해명을 그대로 직역하자면 '난 상관없으니까 제발 나한테 똥물 튀기지 않게 해주십시오!'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얄밉긴 했지만 방현석이 괜한 일에 걸려들었구나, 재수 없겠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후 느닷없이, 부산에 살고 있는 소설가 김곰치의 천둥 같은 글이 올라왔다. 방현석의 글보다 훨씬 소설가의 글에 가까운, 다시 말해 열정과 진정이 넘쳐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확연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표절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지금 우리 문학이 처해있는 중병이 어떻게 도져왔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폭로이자 전 시대적인 문학 싸움의 전초전이라는 것을. 이것은 중견 작가 조경란과 신인 작가 주이란의 싸움이 아니라 '조경란'이란 코드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작금 우리 당대 문학 권력과 양심적인, 그러나 파편화되고 힘없는 작가군과의 일대 전쟁의 시작이란 것을.

변방에 살기에 아직 문학적 순정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소설가 김곰치는 조경란의 '혀'와 주이란의 '혀'를 꼼꼼히 읽어본 다음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조경란의 부도덕성과 재능 없음에 일타를 날렸다. 이런저런 인맥과 이러저러한 안면으로 눈치 보기에 바쁜, 이미 동맥경화증에 걸린 서울 문단으로 보자면 상상할 수도 없는 폭탄이 터진 것이다.

조경란이 누구인가. 신경숙과 은희경을 잇는 다음 세대의 여성작가로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한 이래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받으며 이미 문단의 중심으로 떠오른 작가가 아닌가.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는 이런 작가와는 방현석의 말처럼 그저 무심하게 지나는 게 상책이다. 이미 상업주의에 멍든 출판사는 말할 것도 없고, 비판적 전문성 대신 스타의 박수부대로 전락해버린 언론사 문학 담당 기자까지 조경란을 건드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판단을 한 것 같다. 더구나 극우 보수 신문인 <조선일보>는 때마침 올해 그녀에게 커다란 문학상까지 안겨주지 않았던가!

그런 판에 저 변방, 부산에서, 촌놈 같이 생긴 소설가 김곰치가 겁 없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사정없이 죽은 문학의 신전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조경란을 향해 몽둥이를 날린다.

김곰치는 말했다.

"주이란 작가, 당신은 단편 '혀'와 '촛불 소녀'를 출산한 작가로서 자부심을 가지기 바란다. 조경란 말고 다른 누구라도 당신의 작품을 베낄래야 베낄 수가 없다. 베낄 실력들이 되지 않는다. 엇비슷한 혀 절단, 요리 설정이 있지만, 훗날 당신의 장편 <혀>가 출간되었을 때, 그 내용을 기사로 미리 다룰 신문 기자의 요약 수준으로 중첩되어 있을 뿐이다. 당신의 '사랑하는, 맛보는, 거짓말하는 혀'의 장편은 줄거리나 아이디어 수준으로 다른 누가 쓸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오직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세계에 단 하나뿐인 작품일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미래작을 벌써부터 너무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보인다. 그 사랑도 큰 재능이지만, 그러나 당신을 일종의 인지협착 상태로 빠뜨리고 있는 듯하다. 두 소설을 읽어보건대 도절당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겠는데, 만약 도절되었다면 조경란 같은 작가가 도절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길 바란다."

그런가. 그렇게 좋은 신인이 있었단 말인가. 이쯤 되니 나도 소설을 끄적이며 먹고사는 동류의 한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작품을 찾아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결과는, 기름끼 많은 서양요리를 먹었을 때처럼 느끼했고, 나중엔 텅 빈 소주잔처럼, 씁쓸했다. 김곰치가 지적한 그대로이다. 그래도 한편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을 바꾸어 본다. 심지어는 다 죽은 문학의 시대에 그러면 좀 어때?, 하고 맥락 없는 심통도 좀 부려본다. 이런 약육강식의 시대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기 마련이지, 도덕이 뭐며, 시대 정신은 뭐며, 작가 정신은 뭐 빌어먹을 작가 정신이냐, 나 아니라도 누군가가 하겠지, 하며 고개를 떨궈 본다.

어떻게 보면 모든 문학은 이전 문학의 표절이며 패러디다. 나는 한 작가의 탄생과 성장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다. 조경란의 초기작들이 보여주었던 섬세한 감각과 신선한 이미지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니다. 응원군 삼아 동원된 참고문헌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보통 수십 권의 책을 참고로 한다. 그러나 그것을 작품 뒤에 열거해 두지는 않는다. 빈약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글로 먹고 사는 작가라면 다 알고 있다.

이 너절한 소설 뒤에 붙여놓은 김화영의 너절하고 장황한 해설을 보며 나는 더욱 근질거리는 욕지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혓바닥 위에 세운 감각의 제국'이라는 거창한 제목 아래 거미줄처럼 이것저것 의미망을 만들어 붙여놓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긴 해설을 붙였을까를 끝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한갓진 인간의 말장난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옛 사람들은 이런 짓을 일컬어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고 했다던가. 어쩌면 그가 해설의 말미에 사족처럼 달아놓은 말, "소설 혀를 덮으면서 문득 혀 요리보다는 표면만 살짝 익혀, '입 안에서 벨벳처럼 녹아내리는 붉은 색 레어 스테이크'를 선호하는 나의 미각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목구멍을 간질거리는 것은 '바롤라 존케라'다. 칼도 포커도 필요없는 '바롤라 존케라'를 어디 가면 입술과 혀로 부드럽게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일까?"라는 말이 더 쉽게 다가온다. 그들의 살아온 삶의 방식, 그들의 문학적 감수성과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기호니까 말이다.

하긴 요즘 세상 취향대로 살면 그 뿐이다. 너는 너, 나는 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현기증은 쉽게 가시지가 않는다.

김화영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뒤에 서서 박수를 쳐주고 그녀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는 일군의 무리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렇듯 시끄러운 판에 그녀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게끔 목에 큼지막한 꽃다발을 걸어 준 <조선일보> 동인문학상 평생 심사위원인 유종호·김주영·김화영·오정희·이문열·정과리·신경숙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언지 모를 냄새가, 그들만의 커넥션이 그려진다. 모든 것이 이해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들이 권력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남은 한국 문단의 유일한 파워이다.

모던하고, 댄디하고, 소프트하며,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지적이며, 고상하며, 어떤 코드와도 잘 들어맞고, 시대와 불화하는 척 포즈를 잡지만 사실은 시대와 가장 잘 야합하는, 그들만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지난 시절 독재와 싸우면서 거대한 힘을 가졌던, 아니 힘을 가졌다고 믿었던 작가회의는 마치 유효기간이 지난 식품처럼 껍데기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주변에 모였던 작가들은 뿔뿔이 흩어졌거나 방 아무개 작가처럼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씻고 돌아서기에 바빴다. 그래도 자기는 교수니까.

그리하여 고난의 시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그리하여 거리에서 감옥으로 헤매던 작가들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거나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잔치는 끝났다. 오늘날 우리 문학을 상업주의의 덫에 빠뜨려서 구제불능으로 만들어버린 '문학동네', 이빨 빠진 사자 '창비'와 조용하게, 마침내 모든 권력을 차지한 너무나 지성적인 '문학과지성'과 하릴없이 죽어가는 '실천문학'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잔치는 끝났다. 대신 승리는, 문학의 승리가 아니라 현실적 몫으로서 승리는, 이제 모두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임승차 한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자들에게 돌아갔다. 반동적인, 너무나 반동적인 무리들에게.

그리하여 지금 문학은 죽음처럼 조용하다. 어디 한 곳 살아있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간간히 들려오는 자조적인 빌라도들의 헛기침 소리 뿐. 이 적요함. 이 외로움.

숨 막히게 조용하던 시절 일찍이 시인 김수영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 이제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그렇다. 말을 하자. 무슨 말이라도 지껄여보자. 비평의 날을 잃어버린 비평가들, 무력감에 젖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작가들, 시인들, 문학 교수들, 엉터리 문학 기자들…. 이 거대한 야합을 깨기 위해. 이 무거운, 더러운, 침묵을 깨기 위해.

마치 우리가 그때 그 시절, 순정했던 시절, 처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기 전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을 뱉어주는 것이다!

다른 누가 문학을 멸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재빠르게 먼저, 울대 곳곳에 고여 있는 가래까지 모아, 힘껏 침을 뱉어주는 것이다. 온갖 모멸의 자세로 이 불순하고 음탕한 감성의 시대, 죽어버린 문학 위에, 피를 토하듯 침을 뱉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찍이 우리가 경배해 마지 않았던, 죽은 신에게 마지막 예의를 갖추어주는 것이다.

 

Trackback 0 And Comment 1
  1. 이남규 2010.08.22 16:11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 하세요.

    美花世上(미화세상)을 원하시죠?


    시커먼 먹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조경란의 혀를 뽑아 잘라 주이란에게 보낸다.

    방송국 방송인, 아나운서들의 범죄! 검찰청, 경찰청 고소를 국민들께 알림니다.


    국민 여러 분 ! 단체 회원 여러 분 !
    침묵을 강요하는 혀를 뽑아 잘라 침묵하는 지성에게 보냄니다.
    국민의 자유와 인권, 정의를 위하여 부당한 세력들에게 헌법에 보장된 저항권을 행사 할 때 입니다.


    공개 수사와 언론의 사실 보도를 촉구 해 주십시요.

    범죄 단체 조직원 이외의 여성 분들은 아름다운 분 들입니다.





    大望 (대망)품은 선비, 酒廳 (주청) 酌婦 (작부) 醉談 (취담) 나무랬더니


    酌婦 (작부)들 妓夫 (기부)들에게 人心 (인심)없는 매질을 당했네 !


    피멍든 채 街坊 (가방)에 버려진 선비의 氣品 (기품)


    짓밟힌, 빼앗긴 선비의 氣槪 (기개), 氣品 (기품) 다시 찾으리 !






    피해자이며 고소인인 본인이 처해진 상황을 사행시로 읊었으며, 검찰, 경찰과 그리고 침묵( 외압에 의한 보신인지 방관, 방조인지 모르나! ) 하는 언론의 사명과 사실보도 ( 검찰청, 경찰청 수사 상황 취재와 지면 할애 )를 촉구하고 언론의 권위를 찾으라는 의미에서 각 언론사에 보냄니다.

    더불어 정치적 이념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한겨레, 조선일보에 보내며 酌婦 ( 작부 )라는 단어의 착안을 준 조선일보 문갑식 기자와 범죄 단체 조직원인 소설가 조경란과 표절 시비가 있었던 주이란 소설가에게 보냄니다.

    위 범죄 단체는 방송인, 아나운서 등의 중심으로 통신 비밀법을 위반 무선에 의한 불법 도청, 감청, 도찰을 하고 첨단 무기 ( 두뇌 침투,공존,조종 무기 )를 사용하며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형법 제 5 조에 의한 범죄 단체 조직 활동으로 각종 지식, 정보, 재물 절취 범죄와 고소장에 첨부된 실제 기타 범죄 피해 사례인 특정 범죄, 각종 범죄를 자행하는 형법 제 114 조 에 의한 범죄 단체 조직으로 사회 공공의 안전과 평온을 침해하는 공안 사건 범죄 단체 입니다.

    피해자이며 고소인인 본인은 범죄 단체 조직원과 소설가 조경란에 의한 스토킹, 형법 제 283조, 제 284 조, 제 285 조에 의한 협박의 죄에 시달렸고 제 324 조에 의한 강요죄, 형법 제 291 조에 의한 결혼을 위한 약취, 유인 범죄,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 5 조 단체 등의 조직에 의한 끝없는 범죄에 고통 받았으며 조직원 소설가 조경란과 다른 조직원들에 의한 첨단 무기( 두뇌 침투,공존,조종 무기 )를 수반한 끝없는 미행과 고통 속에 사법고시 수험시절 한 숙소에서 만취 상태인 심신상실 상태에서 소설가 조경란에게 형법 제 299 조에 의한 준강간, 강제추행 범죄 피해와 형법 제 330 조에 의한 야간 주거 칩입으로 인한 수험서 절도 피해를 입었읍니다.

    위 범죄를 수반한 끝없는 1 천 억, 1 조 원의 금전적 회유와 그들 조직원인 노소를 불문한 여자 아나운서들의 성 관계, 매춘 제의를 받았으며 형법 제 324 조에 의한 수 십 여 년의 강요죄, 형법 제 288 조에 의한 영리 등을 위한 약취, 유인, 매매 등에 범죄의 계속적 피해를 당하고 있으며 국민과 법 앞에 양심에 반 하는 삶을 살 수 없는 피해자이며 고소인인 본인에게 범죄 단체 조직원인 방송인, 아나운서 등에 의한 수 십 여 년 성폭력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 12 조에 의한 통신 매체를 이용한 음란 행위 조항의 각종 성 범죄 피해와 항문과 성기에 전파 공격을 하는 등의 계속적 공격 받고 있으며, 동조와 회유에 응하지 않는다 하여 형법 제 255 조 예비, 음모를 하고 형법 제 252 조에 의한 촉탁, 승낙에 의한 살인 등, 형법 제 253 조에 의한 위계 등에 의한 촉탁 살인에 의해 집요하게 손목에 전파 공격과 자살교사로 인해 피해자 본인의 손목을 깊 게 두 번 자해케 했으며 형법 제 254 조 미수범에 해당됨니다.

    위 범죄 단체 조직은 상습법, 경합범, 계속범이며 현행범들 입니다.



    위에 나열한 범죄는 본인의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지금 현재까지 자행되고 있으며 위에 진술하지 않은 첨부 서류에 나열한 기타 특정 범죄, 각종 범죄 피해도 있으며 피해자이며 고소인인 본인은 위 진술에 책임을 질 것이며 한 부분이라도 사실이 아닐 시 에는 형법 제156 조에 의한 무고죄에 처벌을 받겠읍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블로그에서 읽을 수 있읍니다.


    http://blog.daum.net/kingshipk1/2
    http://blog.naver.com/kingshipk/80113159098

법정의 '아름다운 마무리'

|





법정스님의 근작이다.

얼마전 육체에 찾아온 병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스님이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책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 책 한 권이 지난 겨울내내 나를 괴롭혔다.

일부러 시간을 두고 띄엄띄엄 읽고, 다시 읽기를 거듭해 두어달만에 겨우 덮은 책인데, 그 기간만큼이나 스스로에게 스님의 질문들을 되묻곤하면서 자학하기를 반복했다.

오랜세월 인생을 관조해온 스님이, 또 최근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다시 덤으로 사는 인생을 살면서 깨우치고 정리하신 말씀 하나하나가 차향기처럼 그윽하면서도 비수를 찌르는 깨우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언제 방문 앞에서 기다릴 지 모를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에게 노승은 죽음이란 결코 심장박동을 보여주는 오실로스코프의 그래프가 냅다 횡으로 달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않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이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섬이다.



노스님의 말씀대로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현상이다.

자아가 깨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죽은 것과 다름아니다. 내 넋을 온전하게 갖지않은 시간은 고스란히 죽음에 바친 시간일 뿐인 것이다. 


법정은 출가한 스님이지만, 종교적인 선사로서보다 자연주의와 인본주의를 기초로 한 철학가로서의 영기(靈氣)가 훨씬 짙게 느껴진다. 

스님은 한 때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했었지만, 본래의 수행승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오랜동안 홀로 살았다.

하지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자 다시 불일암을 떠나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 문명의 도구조차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왔다. 이런 스님의 실천적 자연주의 철학은 흡사 월든호반에서 오두막을 짓고 한평생 기거한 데이비드 소로우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산 속 깊은 곳에서 홀로 기거하면서 스님은 오롯이 당신만의 시간을 즐겼으리라. 산새들과 채소밭과 꽃모종이 조우하지만, 그들 또한 남이아닌 당신 스스로였던 것이다. 물아일체, 물심일여의 상태다. 책을 대하는 스님의 자세 또한 이와 다름없다.


오두막 살림살이 중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들라면 읽고싶은 책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쾌적한 상태에서 읽고 읽을 때, 즉 독서삼매에 몰입하고 있을 때 내 영혼은 투명할대로 투명해진다.

이때 문득 서권(書卷)의 기상이 나를 받쳐준다. 어떤 그림이나 글씨에서 그 작가의 기량을 엿보려면 이 '서권기와 문자의 향기'가 있느냐 없느냐로 가늠할 수 있다.



온나라 사람들이 스님의 이름을 다 알고, 스님의 가르침을 기다리지만, 정작 스님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기를 좋아하시지 않나보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 하더라도 얼음을 깨 차를 달이는 시간만큼이나 기다림의 여운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사람 만남이 일의 연장이고, 만나서 나누는 얘기가 속되고 속된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노승의 가르침이 매섭다.


습관적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 바닥에서 스치고 지나감이나 다를 바 없다. 좋은 만남에는 향기로운 여운이 감돌아야 한다. 그 향기로운 여운으로 인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사람이 향기로운 여운을 지니려면 주어진 시간을 값없는 일에 낭비해서는 안된다.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여 쉬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가꾸어야 한다. 흙에 씨앗을 뿌려 채소를 가꾸듯 자신의 삶을 조심조심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만날 때마다 새로운 향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소박한 아름다움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스님의 차향기 같은 말씀을 듣고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까무룩히 고개를 떨구는 어린애처럼 자꾸만 물욕에 사로잡힌다. 죽음이 아닌 깨어서 살아있으라는 스님의 얼음장같은 말씀에도 나는 눈앞의 어지러운 거짓됨에 넋을 꺼내놓기 일쑤다.

산속 은자로 살아야 꼭 수도의 길이겠는가. 

오늘 하루 깨어있다면, 깨어있고자 노력한다면 수도자의 구원과 별다를 것 없으리라. 스님은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까? 수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스님에게도 행복은 배움과 노동, 그리고 휴식이 전부다.

내 삶을 이루는 소박한 행복 세 가지는 스승이자 벗인 책 몇 권, 나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 그리고 오두막 옆 개울물 길어다 마시는 차 한 잔이다.

 

2009. 2. 3., Posted by Sweetpee.


덧붙임.

스님이 소개한 시조 한 편이 참으로 그윽해서 덧붙인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 보고 가노메라

송강 정철의 시조인데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에 그림자가 어리어 다리 위를 쳐다보니 한 스님이 지나가고 있다.
대사, 잠깐 물어보세. 어디로 가는 길인가?
스님은 지팡이를 들어 흰 구름을 가리키며 아무 대꾸도 없이 가던 길을 시적시적 지나간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prev | 1 | 2 | 3 | 4 |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