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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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밤, 차를 몰고 퇴근할 때 간간히 라디오에서 '김영하의 문화포커스'를 즐겨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진행자가 바뀌었다.
무슨 연유일까 궁금했었는데, 그가 돌연 유목민의 삶을 택하면서 직장도 집도 다 버린 사정을 최근에 알게됐다.
 
요즘 통 어디론가 떠나보지 못한 근질거림때문인지 자꾸 로드에세이쪽으로 손길이 간다. 
글줄이 마른 작가들은 국내의 섬들로, 티벳으로, 인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훌쩍 떠나가서 책 한 권을 들고 들어온다. 
이들의 감성어린 글과 사진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여행전문가들의 입지가 좁아지지나 않을지 염려될 정도다.  

작가들은 왜 떠나가고 있을까? 곰곰 생각해본 끝에 그릇에 물을 채우기 위함이란 결론에 다다른다.
물을 채워야 창작의 산물을 생산해 낼 텐데, 늘 새로울 것도 없는 도심의 좁은 방안에서 그 창작을 위한 물채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 세대 전의 문학가들(조정래, 황석영, 김지하 등등)은 가만히 앉아 신문을 보거나 라디오만 켜도,
아니면 길거리에 나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얘기만 들어도 소위 '꺼리'들이 넘쳐났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전쟁과 군사독재, 정치부패와 민주화까지 지난세기 시작점부터 세기말까지 우리 역사 자체가 꽉찬 한 편의 대하소설이다.
그 정신없었던 역사의 뒤안길을 쑤시고 다녀보면 굴곡진 역정없는 삶이 드물다. 

그러나 지난 세기 외환위기 시련까지 무사히 견디고나자 도통 세상이 시들해져버렸다. 냉전은 화해를 구했고, 이념보다 경제가 우선했다. 
크고작은 사건들은 이어졌지만,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세상살이의 어려움은 별달리 없었다.
세계화와 보호무역의 완화는 물꼬가 터지듯 다양한 분야에서 해외문물을 수용하게 했다. 

세계화의 물결은 문학세계도 글로벌화시켰다. 일본소설이 국내시장을 잠식하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기욤 뮈소, 파올로 코헬료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의 책은 출간되면 무조건 대박을 터뜨렸다.
최근에는 중국이나 제3세계 국가들의 소설도 부쩍 눈에 띈다. 

시장논리로 따질 것은 아니지만, 공급은 이렇게 넘쳐나는 데 수요는 줄어들고 있다.
텍스트미디어에 싫증난 독자들은 복합미디어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다양하고 빠른 세상을 찾아간다.
인터넷은 엄청난 미디어로 가득한 '천공의 성'이며, 블로그 등 개인미디어들로 말미암아 문학의 세계도 대중 창작,
또는 대중 감정(Mass Connoisseurship)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런 마당에 가만히 방구석에 틀어박혀 펜대를 굴려봐야 해답이 없다.
글도 읽히는 글이 아닌 보이는 글을 써야 하는데, 방안에서 보여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결국 작가들은 세상 밖으로 나아가 창작을 위해 물을 채워넣어야 한다는 숙명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 김영하의 경우엔 좀 더 과감한 선택을 한 듯 하다.
그에게는 소설가라는 직업 외에 국립예술대학의 교수와,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란 명함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훌쩍 유목민의 길을 떠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이 책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에서의 경험담을 사진과 함께 담은 로드에세이다.

그러나, 시칠리아에 대한 기행담보다 서문에 담긴 그의 새로운 인생 출사표가 더욱 인상적이다. 
당장 시칠리아에 갈 일도 없으니, 이탈리아의 철도시스템이 엉망인 것과, 지중해의 뜨겁고 건조한 열기,
올리브향과 시칠리아인들의 인간적인 향기가 지금 나에게 당장 특별한 의미를 가질 이유가 없다.
언젠가 그 곳을 찾게될 즈음이면 이 책을 다시 꺼내 보겠지만...

오히려 작가가 '흘러가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계기가 더욱 인상적이다.

그에게 얹혀진 제복같은 명함들을 다 버리고 훌쩍 노마드로의 인생을 꿈꾸게 된 과정.
집안의 책들과 가재들을 모두 버리고, 각종 계약과 금융거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느낀 소소한 감정들이 가슴에 와닿는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고, 버려야지 마음먹어도 정작 버릴 의지가 없는 나로서는 그의 용기있는 선택이 자못 부러울 따름이다. 
그가 후기로 남겨놓은 글이 더욱 가슴저리게 다가오는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 긴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짐을 점검해보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전광판을 보며 나는 지난 세월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 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길을 나섰지만, 나는 무언가 잃어버린 사실만 알고있다.

그 뿐이다. 어디가서 어떻게 찾아야 할 지 도대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라리 잃어버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면...



2009. 1. 31., Posted by Sweetpee

  
Trackback 1 And Comment 3
  1. 2009.02.04 15:17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QWR 2009.04.20 15:07 address edit & del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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